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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5-30 02:59
[2009/12월호] 최호철 작가 - "전태일의 눈으로 본 세상의 뒷면"
 글쓴이 : 우만연
조회 : 3,919  



취재:설인호/사진:김형욱


지난 9월에 있었던 2009년 부천만화대상 시상식. <태일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한 최호철 작가의 수상소감은 담담하고 겸연쩍었다. 전태일이 남긴 마지막 절규마저도 무시당하는 엄혹한 현실을 의식한 탓일까, 아니면 그가 남긴 복음과 불편한 진실을 호소하기에는 여전히 자신의 작품이 미약하고 부끄럽다는 자의식 때문이었을까. 최호철 작가는 무겁게 다가오는 ‘전태일 열사’라는 신화를 5권짜리 만화를 통해서 ‘태일이’라는 하나의 이웃이자 친구로 발굴해냈다. ‘최호철이 사로잡힌 태일이’, 혹은 ‘태일이가 사로잡은 최호철’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Q.우리만화
만화 <태일이>의 완간과 부천만화대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5권에 달하는 분량이면 꽤나 힘든 기간이 소요된 결과물인데, 어떻게 구상하게 되셨고 계기는 뭔가요.  

A.최호철
감사합니다. 군 제대하고 우리 리얼리즘 미술과 사회현실에 눈 떠가고 있을 때 전태일 평전을 읽었는데 세상에 대해 몰랐던 절반을 본 듯한  충격을 받았고 그간 참 순진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는 그 삶이 이미지로 머릿속을 맴돌 때가 많았는데 작업하는데 많은 영감을 떠올리게 해주었습니다. 제가 민중미술에 뜻을 두게 된 데에도 큰 영향을 준 것 같고요. 그로부터 2년쯤 지나 당시에 함께 작업하던 독립 애니메이션 팀과 함께 전태일의 이야기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려고 청계피복 노조를 찾아갔다가 그쪽의 권유로 노조 문화학교 야학의 그림반 강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전태일의 삶을 10쪽짜리 단편만화로 그려 야학 교재에 실었습니다. 언젠가 장편을 해야지 하는 욕심만 가지고 있다가, 2003년 어린이 교양지인 <고래가 그랬어>의 창간과 함께 한번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10쪽짜리 만화가 십년 후 <태일이>의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Q.우리만화
전태일이라는 인물이 작가님께는 어떠한 존재인가요.

A.최호철
제게 전태일 열사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게 만들려는 멋진 사람, 자신의 눈으로 세상의 뒷면까지도 볼 수 있는 명석함을 체득한 사람, 혼자 할 수 있는 일과 함께 할 일을 구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여 집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은 제가 추구하는 리얼리즘 미술의 작업태도에 본보기가 됩니다. 삶에서는 따라하기 힘들지라도 적어도 그림 그릴 때 만큼은 그 정신이 어디엔가 담겨있기를 바라면서 작업을 합니다.





* 전태일은 밝고 유쾌했던 사람


Q.우리만화
<고래가 그랬어>에 몇 해간 연재하신 <태일이>는 어린이들에겐 다소 무거운 주제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A.최호철
좀 어둡다는 평이 있었지요. 어린이물이 아니었다면면 태일이는 더 어두운 내용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엔 성인용으로 기획했었고 처절한 노동현장 공장분위기 등등의 이미지를 구상했는데 어린이용이다 보니 일부러 밝게 묘사하려고 했었는데, 실제로 공부해 보니 전태일은 밝고 긍정적이고 유쾌한 면이 많았어요. 결과적으로 어린이용으로 작업한 것이 차라리 잘 된 것 같습니다.




Q.우리만화
독자들, 그러니까 어린이들의 관심이 컸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재 중에 겪었던 사연이 있다면?  

A.최호철
제 작품 중에 만화형식의 본격적인 서사이야기 구조를 가진 장편만화는 태일이가 유일해요. 처음 연재를 시작할 때는 곤혹스럽고 당황스럽더군요. 연재만화는 생산량을 담보할 수 있는 숙련기간이 필요한데, 아직 그땐 준비가 미흡했던 것 같습니다. 거기다 워낙 출판사의 사정도 열악했고 저는 저대로 마감이 늦어져서 많이 힘들었어요. 독자의견을 늘 주시할수 있는 조건에서 연재한 것이 아니었고 반응이 좋았다는 것을 당시에는 잘 몰랐습니다. 다만 어린이들이 의외로 전태일의 어린시절의 삶에 관심을 가지고 보고 있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많았습니다. 특히 태일의 아버지에 대한 인상은 특이했는지 아버지에 대한 반응이 많았습니다. 초등 4학년인 저의 아들 희람이는 태일이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라구요.




* 민중미술이 내 작업의 뿌리




Q.우리만화
대학시절에는 미술운동을 하시다가 만화작가(그림책작가) 쪽으로 입문하셨습니다. 대학시절 미술운동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요.

A.최호철
홍익대를 다녔습니다. 당시 홍대는 사람 그리는 사람, 사람 안 그리고 현대나 추상미술을 좋아하는 사람, 이런 식의 구분이 있었어요. 저는 물론 ‘사람’을 그리는 쪽이었는데, 당연하게 미술운동하는 쪽과 접촉이 됐고, 공부모임을 나가게 되고, 자생적인 학술동아리같은 활동을 하게 되었지요. 구소련이 망하기 전이므로 사회주의미술이니 리얼리즘 미술에 대한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민중미술이 내 작업의 뿌리가 될 것이라는 의지나 예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활동을 하기 보다는 모색을 좋아했다고나 할까요. 복제가능한 미술에 대해 관심이 생기기 시작햇고 그것이 자연스레 출판미술에 대한 관심으로 옮아갔어요. 이미 미술운동판의 선배들이 만화, 판화, 벽화, 출판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어떤 것을 선택해서 하는데 선택 자체로 갈등할 시간은 줄일 수 있었지요. 민중미술가 홍성담 선생이 잡혀갔을 때 민미연 사무실에 취재를 갔다가 자료를 받아서 구속미술인 석방에 관련한 만화를 그리기도 했어요. ‘가는패’라는 대학연합동아리 활동할 때는 구속미술인 석방을 위한 전시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고경일 작가와 현재의 아내인 유승하 작가를 만나게 된 겁니다. 이것이 만화와 만화가들을 처음으로 조우를 하게 된 계기입니다.



Q.우리만화
95년도에 ‘새싹만화공모전’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만화계에 입문하셨지요?

A.최호철
‘자전거’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받았어요. 당시 보리풀, 청계야학에서 독립애니메이션 팀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백정숙 선배(만화 평론가)와 박재동 선생을 알게 됐어요. 이후 현재의 아내인 유승하 작가와 조남준 작가와 함께 작업실 생활도 했고, 새싹만화상을 받은 계기로 우만협 선생들의 소개로 한겨레아카데미에서 만화 기초반을 가르치게 된 거죠. 그 경험이  현재 청강대 교수를 맡게 된 경력이 됐고요. 




Q.우리만화
<태일이> 같은 극화 말고도 다수의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만화가이자 그림책작가로서 나름의 철학이나 가치관이 있다면?

A.최호철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을 그리자는 생각은 갖고 있는데요. 태일이 작업 중에 간간히 틈틈이 그림책 작업을 하곤 했었는데 뚜렷하게 작업방향을 못 잡고 있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어요. 꾸준히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는 있는데 대부분 단타작업들이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하게 되더군요.







A.우리만화
만화가, 혹은 그림책 작가로서 자신을 스스로 진단해 보신다면?

Q.최호철
직업적 만화가로서의 소양은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화를 좋아하고 잘하고 싶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만화가는 제가 하고자 하는 것을 생산하는 사람입니다. 저의 경우 망설이는 시간이 많고 마감 완수 등의 프로적인 면이 부족하지 않는가 싶거든요. 부천만화대상의 경우 좀 더 상업적인 작가에게 상이 갈 줄 알았는데,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그해 출판한 책을 대상으로 하다 보니, 5권짜리 태일이가 점수를 잘 받은 거 같습니다.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대중성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당시 시상식장에서 수상소감으로도 말했지만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는 작가로서의 소명의식에 대한 격려가 아닐까 싶어요.
  
















* 사회의 모순을 공간을 통해 발견하다


Q.우리만화
최호철 작가님의 대표작으로 <을지로 순환선>시리즈와 같은 그림들이 떠오릅니다. 하나의 화폭 속에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필요에 따라 의도적인 구도의 왜곡도 즐겁고요. 이러한 시리즈를 기획하게 되신 계기는 무엇이며 현재도 계속 이런 컨셉을 유지하고 계신지요, 혹은 새롭게 추구하는 다른 컨셉이 있다면요?

A.최호철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이나 관계 등이 공간을 통해 보여지는 것을 발견하는 것도, 그것을 그리는 것도 좋아합니다. 꾸준히 계속될 것 같습니다.




Q.우리만화
현재 청강문화산업대학 만화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십니다. 직업으로서의 교수, 그리고 만화가로서 활동하는 것에 대한 여건이나 생각은 어떠하신지요.

A.최호철
만화를 그리고자 하는 학생을 가르쳐서 세상에 내보내는데, 그 학생들이  보기에 교수라는 자리에 안주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하는 작가로 현장에서 다시 만날 수있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실제로 가르치는 것과 개인적 창작은 시간적으로나 마인드적인 면으로나 많이 부닥칩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가르치는 것인데, 가르침에 치중하다보면 새로움을 창작해내는 추동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누구는 가르치는 것을 통해서 동력을 받아 영감과 모티브를 얻어내는 것 같은데, 현재 나 같은 경우에는 에너지의 방향이 여러 갈래라서 줄타기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Q.우리만화
국내에는 현재 청강대를 비롯해서 여러 만화관련 학과가 많이 있습니다. 일선 대학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시면서 느끼는 한국만화교육의 현실은 어떤가요.

A.최호철
청강대 만화창작과는 매년 현장의 변화을 읽으며 커리큘럼을 바꾸는 전통을 가지고 현장에서 바로 활용할 수 있는 작가다운 자세와 기본기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지침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현장출신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학과를 끌어가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봅니다. 요즘은 웹만화, 모바일, 엡스토어 등의 시장에 적응할 수 있는 커리큘럼을 개발 중입니다.




Q.우리만화
만화판이 점점 더 복잡다단하게 진행되고 있는 듯합니다. 작가이자 교수의 입장에서 ‘우리만화’에 대한 의견이 있다면?

A.최호철
사실 많은 부분에서 고민을 함께하지 못하고 있어서 죄송스럽습니다. 저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그림 그리는 사람 사이에서만 있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 속에 있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졸업하고 민중미술판에서 있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미술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좋았긴 했지만 정작 창작에 대한 고민이나 스케치활동 등의 자기관심사나 분야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을 느꼈습니다. 반면에 당시 바른만화협의회에 참석했더니 모임들이 활성화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만화판의 베테랑들이 고민하고 활약하는 모습도 좋았고, 그래서 무척이나 기분 좋은 단체라고 생각했었지요. 지금 우리만화연대는 사단법인화 되고 여러 고민을 떠안게 되고 정부차원 행사관련한 일을 처리하다 보니 예전의 그런 느낌은 많이 느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Q.우리만화
아내되시는 유승하 작가도 만화가이자 그림책작가입니다. 부부가 직업이 같기 때문에 살면서 느끼게 되는, 겪게 되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A.최호철
일반적으로 같은 작업을 가진 부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도 가지고 있지요. 아내는 작업동료, 집은 작업실이나 공장, 가정은 무슨 회사생활 하는 것 같을 때가 많지요. 서로 동시에 마감이 걸릴 때는 육아 가사등의 분담 때문에 갈등이 많이 생기는 편이고요. 첫째가 희람이, 둘째는 홍이. 희람이가 이번에 초등학교 5학년 올라가는데요, 그 동안 각자 마감 때문에 서로 시간을 조절해서 애들과 놀아주고 하는 식으로 했어요. 언젠가 제가 다쳐서 6개월 정도 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아이들과 많이 놀았고 아내도 작업이 비교적 용이했었던 것 같아요. 같은 작가의 입장에서 볼 때, 아내인 유승하 작가한테는 미안함이 크죠.


















Q.우리만화
<태일이>이후에 새로 구상하고 계신 작업이 있으신가요?

A.최호철
부천만화상으로 인해 영상진흥원에서 개인전이 계획되어있는데 그 준비와 연결한 작업이  주로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전 같은 경우 전태일에 국한된 주제가 아니니까 주로 다루던 주제를 계속 다룰 생각입니다. 다음 작업은 구체적이진 않지만 수도권 일대의 도시계획과 관련된 만화나 평면작업(일러스트)을 구상하고 있고요, 만화출판에 대해서 경험한 김에 쉽게 풀릴지 모르겠으나 만화형식으로도 진행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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