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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12-22 17:05
회화야? 만화야? ‘독특하네’ (오마이뉴스)
 글쓴이 : 김종범
조회 : 3,484  
▲ 2003 서울애니메이션센터 공모에서 당선된 '그림자 소묘'
ⓒ2004 yes24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당선작, 김인의 <그림자 소묘>

느림과 빠름은 반대말이지만 빠름은 이미 대세이니 느림과 격이 맞지 않는다. 화려함과 소박함도 마찬가지다. 느림과 소박함은 절반의 영역을 갖기보다 오히려 구석에서 '별종' 취급을 받는다. 누구나 다수에 섞이려 하기에 '별종'이 되는 것은 웬만큼 눈치가 없거나 강심장이 아니면 힘든 일이다. 하긴 요즘 같은 때는 별종조차도 금세 유행을 타서 대세가 돼버리곤 하니 때때로 헷갈리긴 하지만 말이다.

만화 '그림자 소묘'는 틀림없이 세상 유행 아랑곳없이 만든 용감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먹으로 스케치하듯이 그린 그림, 펜으로 뚜렷하게 그린 그림이 지배하는 요즘, 이 그림은 오히려 갤러리에서 봐야 할 그림처럼 느껴진다. 방학기와 오세영이 투박한 질감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지만 대중의 폭넓은 관심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지 않은가.

인물들은 그다지 말이 없고 행동은 느리다. 그림으로 화면을 꽉 채웠으되, 그림에서는 여백이 느껴진다. 박흥용이 '세련되고 이미지로 다가오는 여백'이라면 '그림자 소묘'는 '서툴면서 느낌으로 다가오는 여백'이다.

"대개의 순정만화가 가진 한계-남성을 향한 판타지를 배재하고…이와이 순지의 '하나와 엘리스'처럼 순수한 사춘기 소녀들의 삶을 그려내지만, 과장된 순진무구함 속의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쌍방의 소통이 가지는 의미와 정체성을 찾는 진지한 과정에 주목한다"는 기획의도에서 이미 우직한 방식을 택하겠다는 의지가 읽혀진다.


▲ 만화보다는 오히려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림체
ⓒ2004 김대홍

▲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춘기소녀. 자아의 부재를 의미한다.
ⓒ2004 김대홍

이야기 줄거리는 피터팬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울고 있는 피터팬은 곧 개인 자아가 사라져버린 현대인을 상징한다. 친절하고 덜렁대며 허허 잘 웃는 김모씨의 명함에는 어느 회사의 어느 직함만이 기입된다. 입시 준비에 한창인 학생들은 전교 몇 등, 어느 대학 갈 애로 소개되는 것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러한 현대인의 상실을 그림자를 잃어버린 사춘기 소녀와 농촌을 떠나 도시에 정착한 학생을 통해 보여준다.

한 아이의 이름은 주희. 해바라기를 좋아하는 주희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이모를 따라 서울에 올라온다. 그러나 평생 자연을 배경으로 성장한 그에게 콘크리트로 가득찬 도시는 도무지 방향을 알 수 없는 곳이다. 매번 집을 찾지 못해 헤매던 그가 마침내 집에 오는 길을 찾는다. 바로 도시속에 깃든 자연을 찾아 그림 지도를 완성한 것.

어느 집 대문위에는 상추가 자라고 있고, 또 어느 집에는 작두콩이 안테나를 타고 올라가고 있다. 공사장 옆에는 향나무가 자라고, 세탁소에는 기름냄새를 잊게 하는 나팔꽃이 차양 역할을 한다. 이런 식으로 주희의 지도에는 번지수 대신 나무와 꽃, 풀 등이 방향이 표시된다.

또 한 소녀는 예민한 성격을 가진 사춘기 소녀다. 친구와 어울리는 못하는 그녀는 투명인간과 다를 바 없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고,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데, 어느날 떨어진 그림을 물끄러미 보던 그를 주희가 바라보면서 비로서 그는 존재감을 가진 인간으로 살아난다. 그림자의 부활인 것이다.

'그림자 소묘'는 두 소녀가 각각 별도의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어느 부분에서 만난다. 별도로 떨어진 단편이면서 전체로서 장편을 이루는 것.

낯선 그림체에 낯선 전개방식이지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질문을 던지는 작가의 시각 때문이다. 주희는 서울에 올라와서 왜 상추을 돈 주고 사먹어야 하는지 이모에게 묻는다. 고향에서 상추는 사먹는 게 아닌 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너무 커서 집이 좀 답답해 보이지'라는 이모의 말에 주희는 '나무가 더 답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 농촌에서 올라온 주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지도를 만들었다.
ⓒ2004 김대홍
미술학원 입구에 난 풀을 이모는 '잡풀'이라고 생각하지만, 주희는 '생명의 신비'로 생각한다. 잡풀에 물을 주는 미술학원 원장의 행동도 주희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질박한 멋을 뽐내면서도 한 번씩 툭툭 던져지는 아름다운 표현들은 그래서 더 멋스럽다. 서울의 야경을 보고 '하늘의 별이 다 땅에 내려와 부렀어'라는 주희의 말이나 '파리가 꽃가루를 나르던 맨드라미' 등은 사물을 유심히 관찰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표현들일 것이다.

이미 조미료 맛에 익숙한 이들에게 천연 재료만 사용한 질박함은 '맛없음'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미각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를 원한다면 때로는 질박한 음식을 먹어주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 만화는 2003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공모에 당선된 김인의 작품이다. 글씨는 서울애니메이션센터 만화가 전문과정을 수료한 가시눈이 썼다.

김대홍(bugulbugul)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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