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 어떤 폭력이건, 그것에 대해 좀 더 섬세하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쪽은 가해자보다는 피해자인 경우가 많다. 특히 여성인 경 우에는 더욱.
여기 여자와 남자가 있다. 여자의 ‘키스해도 돼’를 남자는 ‘ 섹스해도 돼’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그녀를 덮쳐버린다. 그럴 때 기억은, 피해자인 여자의 깊은 곳에 파고들어 오래 괴롭힌다.
이 만화속의 에피소드 ‘그게 뭔지 몰랐어’처럼.
만화 ‘신체적 접촉에 관한 짧은 회상’(정송희 지음·새만화책 ·사진)은 특히 여성이 받은 상처의 기억들을 풀잎처럼 섬세한 감성으로 그려낸 단편집이다. 이 만화에 수록된 비슷한 소재의 단편들은 각각 ‘폭력’에 대한 기억이나 경험들을 말하고 있다.
단편 ‘팬티 빠는 아침’에서 소녀는, 생리 때가 아닌데 부정 출혈로 피가 묻자 속옷을 빨면서 처녀막이 터지면 시집가서 소박맞 는다는 소문을 떠올리며 몸서리친다.
‘신체적 접촉에…’에서 남자친구의 뜨거운 손길을 피해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어릴 때 같은 반 여학생을 추행하던 선생님의 손 을, 남자는 옛날에 이웃집 여자아이를 추행하던 자신의 손을 떠 올리며 불편해한다. ‘그게 뭔지…’에서 허물없이 어울리던 같 은 과 남학생에게 엠티 가서 강간을 당한 여학생은 이후 남학생 과 서먹해지고, 이후 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도 어딘가 거북스러 워한다.
에피소드 ‘관계’에서 아르바이트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동시에 집안의 궂은 일 까지 도맡아 하는 맏딸은 가족과 남자친 구에게조차 무시당하면서도 그들에게 당당하지 못하다. 이 책에 수록된 만화들은 폭력과 그 기억에 대해 말을 하고 있지만 그것 에 대해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폭력의 주체가 누구라고 가리키지도 않는다. 가해자건 피해자건 그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단지 펼쳐 보여주기만 할 뿐 이다. 그런데 그 모양은 매우 정교하고 섬세해서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이 얼마나 잔인하고 불공평한 것인지. 또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그게 잘못 된 줄 모르고 살아가는지.
만화스토리작가 klavenda@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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