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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08-27 11:21
깊은 울림이 있는 만화책 <꽃>(오마이뉴스)
 글쓴이 : 김종범
조회 : 2,339  
<1> 시끄러운 도시에 길든 사람은 맛볼 수 없는 책

▲ 겉그림입니다.
ⓒ2004 새만화책

어젯밤입니다. 자정을 넘긴 때까지 일을 하다가 등허리가 아파서 자리에 잠깐 엎드려 있었습니다. 아무 것도 않고 등허리를 펴고 있자니, 창 밖에서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려옵니다. 바람 윙윙거리는 소리, 자동차 달리는 소리, 귀뚜라미 소리,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 이웃집 텔레비전 소리….

도시에 살면서 들을 수 있는 소리는 자동차와 텔레비전과 전화기와 컴퓨터 소리가 중심입니다. 길가 가게에서 틀어놓은 시끄러운 노랫소리와 물건 파는 사람들의 마이크 소리도 대단해요. 물 흐르는 소리, 새가 우는 소리, 온갖 벌레 우는 소리, 바람 부는 소리는 거의 안 들립니다. 자연이 주는 소리가 없는 도시라서 사람마음이 자꾸만 자연스러움과 멀어지고, 자연스러움과 멀어지면서 팍팍하고 이기주의로 치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웬 난데없는 소리 타령이냐고요? 음, 그럴 까닭이 있습니다. 만화책 <꽃> 1∼4부를 다 보았거든요. 아니, 만화책 <꽃>을 다 본 느낌과 자연이 들려주는 여러 소리와 도대체 어떻게 이어져 있느냐고 물으실 테죠? 그런데 참 잘 이어집니다.

만화책 <꽃>은 온갖 시끄러운 도시 소리를 잊은 채 보아야 제대로 맛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 중계를 기다리고, 텔레비전 연속극에 눈이 빠지며, 막히는 찻길을 자가용 끌고 다니는 한편, 손전화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수다를 떨거나, 하루 내내 컴퓨터 화면만 들여다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맛도 느낌도 울림도 생각도 못 주리라 생각합니다.

<2> <꽃>이 들려주는 이야기

만화책 <꽃>은 우리 나라 현대 역사를 그립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제국주의 나라가 되어 우리 나라로 쳐들어와서 주권과 인권을 빼앗을 때 이야기로 첫머리를 엽니다. 친일부역을 하는 사람들 이야기, 어쩔 수 없이 등굽히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 억지로 징용과 징병과 성노예로 끌려가며 눈물 흘리다가 죽은 사람들과 겨우겨우 돌아온 사람들 이야기, 해방을 맞이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기뻐서 웃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아요.

▲ 일제 강점기 때. 소작을 짓는 어머니와 나(어린 주인공)는 마름 눈치를 보며 다친 발을 천으로 감쌉니다. 말 한 마디 없으나 긴장감이 팽팽합니다.
ⓒ2004 새만화책
그런데 이들에게는 크나큰 아픔이 이어집니다. 그건 바로 '전쟁'입니다. '전쟁'도 그냥 전쟁이 아니라 한겨레끼리 죽이고 죽어야 하는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전쟁은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 나라에게 식민지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힘이 없어서 맞이한 전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남을 때려눕히는 힘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지키고 자기 줏대를 세우며 함께 어우러지고 어깨동무하는 힘입니다.

친일부역자를 벌주지 못한 우리는, 미국과 소련이 들어온 이 땅에서 외려 일제 식민지만 못한 형편으로 살아가고, 그 사이에 이 나라 사람들은 패가 갈릴 뿐 아니라, 남북으로까지 갈립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요.

만화책 <꽃>은 한국전쟁 이야기 가운데 '남부군 빨치산' 사람들 이야기를 2부부터 보여줍니다. 조용한 한 마을에서 오순도순 살가운 동무로 살던 이들, 한 식구처럼 오붓했던 마을사람들이 토벌군과 빨치산으로 갈려서 싸우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토벌군이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마을사람을 죄다 쏴 죽이고 파묻는 끔찍한 양민학살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빨치산은 왜 빨치산이 되어서 그렇게 총을 들어야 했으며, 토벌군은 또 왜 토벌군이 되어서 그렇게 총을 들어야 했는지 들려줍니다. 빨치산도 토벌군도 슬픕니다. 모두 다 이 땅에서 농사꾼 딸아들로 태어나 땅을 부치며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고 어깨동무하면서 웃고 울던' 한 이웃이자 한 식구였거든요.

남녘 땅에서 빨치산은 하나둘 쓰러지고 사라지고 죽습니다. 만화책 <꽃>에서는 딱 한 사람이 살아남습니다. 그이는 힘있는(정치 권력) 동무가 '전향서 한 장'만 쓰면 빼내 준다는 설득에 고개만 가로젓습니다. '진급'과 '아늑한 새 살림'을 바라며 현실(?)로 돌아선 동무는 저 멀리 떠나고, 옥에 갇힌 고향 동무는 죽는 날까지 차디차고 좁디좁은 돌 방에서 옛 생각에 젖어요. 그러던 어느 날, 옥에 갇힌 이 돌 방에 꽃씨 하나가 날아듭니다.

<3> 가슴마다 피워 올리는 꽃

죽은 사람도, 죽인 사람도 가슴에 꽃씨 하나 있습니다. 꽃씨 하나 품습니다. 잘살고 싶다는, 행복하고 싶다는, 사랑하고 싶다는, 믿고 싶다는, 배곯지 않고 싶다는, 웃고 싶다는, 마음껏 들판을 뛰어다니고 바다를 껴안고 싶다는 조그마한 꽃씨 하나를 품고 삽니다.

가슴에 씨가 내리고, 뿌리 내리며, 줄기를 올리고, 잎을 틔운 뒤, 봉우리를 터뜨리는 꽃은 어떤 꽃일까요? 친일부역을 하는 사람 가슴에 핀 꽃은? 등굽히고 살아야 했던 힘없는 백성들 가슴에 핀 꽃은? 해방되기 무섭게 또 다시 변절하는 사람들 가슴에 핀 꽃은? 빨치산이 되고 토벌군이 된 사람들 가슴에 핀 꽃은? 전쟁은 끝났어도 자유민주주의가 자리잡지 못하고, 외려 독재정권 때문에 쉰 해 가까이 숨도 못 쉬고 살아야 한 이 땅 보통사람들 가슴에 피는 꽃은? 뿌리조차 내리지 못한 꽃씨, 줄기와 잎은 올리고 틔웠으나 채 봉우리를 터뜨리기 앞서 꺾여 버리고 만 꽃씨는 없을까요?

▲ 해방 뒤 이 땅으로 들어온 미군이 들꽃을 짓밟는 모습. 이 그림 한 장은 해방 뒤 역사를 아주 또렷하고 깊이있게 보여줍니다.
ⓒ2004 새만화책

[빨치산 대장] 이 전쟁에서... 네가 얻는 게 뭔가?
[토벌군 대장] 흐흐, 네놈은 얻는 게 뭐냐?<3부 49쪽>


무얼 얻을까요? 무얼 받을까요? 무얼 잃을까요? 전쟁이 끝나고 빨치산과 토벌대와 민간인 죽음은 끝났는데, 모두들 무얼 얻고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화책 <꽃> 주인공인 쟁초는 토벌군과 총격전을 하는 동안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총대를 쥔 것은…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 변명해 본다. 놈들의 가슴팍에 총을 겨누면서... 내 총에 맞지 않기를…무엇을 위해 서로 죽여야 하는지 해답도 없이…적이 아닌 형제의 가슴에 총을 쏘면서… 제발 맞지 않게 해 달라고…."<3부 72~74쪽>

일본 제국주의 나라가 이 땅으로 쳐들어오기 앞서는 마름과 지주에게 짓눌려 살아온 백성들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나라가 물러간 다음에는 미국과 모리배에게 또 다시 짓눌려 살아온 백성들입니다. 그 다음에는 독재자와 '밤의 권력자'에게 눌려서 살아온 사람들이고요. 이 사람들 가슴마다 피워 올리는 꽃 한 송이를 짓밟을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습니다. 사람마다 꽃 한 송이를 피워 올리며 오순도순 살아갈 권리가 있을 뿐이에요. 내 총에 네가 맞지 않기를 바라듯, 네 총에 내가 맞지 않기를 바랍니다.

<4> 큰 만화 <꽃> 다음도 기다리며

우리 나라에도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길고 줄거리가 있으며 무게가 있는 만화를 그리려고 애쓰는 사람도 적지 않아요. 하지만 오래도록 우리 가슴과 머리에 남는 만화를 힘써 그려내는 사람은 참 드물다고 봐야지 싶습니다. 그 가운데 역사 만화를 그려내는 사람이라면? 몇 사람을 떠올릴 수 있을까요? <장길산>을 그려낸 백성민씨를 빼고 딱히 누구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백성민씨는 옛 역사를 그렸습니다. 옛 역사를 그리는 일도 쉽지 않고 걸림돌이 많지만, 요즘 역사를 그리는 일은 더욱 어렵고 걸림돌이 많습니다. 남과 북이 갈라져 있는 한편, 비틀린 역사의식이 사회를 주름잡고 있으며, 우리 교과서에서 현대사를 아직까지도 제대로 담아내어 가르치지 못하거든요.

이런 사회 흐름을 생각한다면, 만화 <꽃>은 아주 남다릅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날카롭고 가슴아픈 현대역사를 담았거든요. 일제 강점기부터 요즘 우리들 모습까지 그립니다. 그리고 그 줄거리는 보통으로 살아가던 어느 두 사람 삶이고, 두 사람 둘레에 있는 보통사람들입니다. 책을 보다 보면 '어떻게 이 만화에 나오는 사람이 보통사람이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맞습니다. 옳지 않은 길을 가지 않으려 했고, 조촐하면서도 오붓하고 조용하게 살아가고픈 사람들 삶을 그리거든요.

그러나 그 사람들이 겪는 일이란 아픔과 슬픔뿐. 돈도 이름도 힘도 아닌 즐거움과 어우러짐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슬픔, 이것이 바로 우리 현대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대목이 아닐는지요.

▲ 만화책 <꽃> 주인공이 죽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이 주인공(쟁초) 눈에는 고이 보이는 꽃 한 송이를 다소곳이 감싸며 감옥에서 눈을 감은 모습입니다.
ⓒ2004 새만화책
만화책 <꽃>을 보면 1부에는 아무런 대사(말)가 없습니다. 그냥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펼쳐요. 2∼4부에서는 대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대사가 없는 1부(가장 깁니다)가 주는 울림이 아주 좋습니다. 오히려 무슨 대사를 넣었다면 만화를 보는 재미가 떨어졌겠다 싶더군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나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 수 있고, 가슴으로, 우리 마음으로 이야기를 부대끼는 한편, 서정성 짙은 그림이 주는 아름다움도 담뿍 맛볼 수 있습니다.

이만한 만화책이라면 어디에 내놓아도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고, 역사책 몇 권을 읽는 넉넉함도 있다고 봅니다. 이이화 선생이 <한국사 이야기>를 마무리한 일 못지 않게 만화책 <꽃> 1∼4부는 우리 역사를 갈무리한 아주 소중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 가지. 만화책 <꽃>에서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적은 부수(500부 한정)를 찍다 보니 책값이 오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독자를 만나기 더욱 어려우리라는 것. 어쩌면 이런 만화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즐기지 못하는 우리네 현실 탓인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잘 빚어낸 만화책이라면 기꺼이 주머니 털어서 사서 볼 만하건만, 우리네 문화 눈높이는 조금도 그렇지 못합니다.

그린이 박건웅씨는 앞으로도 우리 현대역사를 만화로 담아내는 힘겹고도 오랜 일을 차근차근 한답니다. 제주도 현대 역사를 그리는 일을 이어서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두 해만에 나올 수 없는 깊이와 너비가 있는 역사 만화입니다.

이런 만화를 그려내려고 애쓰는 박건웅씨와 이런 책을 기꺼이 펴내는 출판사가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며 더욱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우리들도 차분하게 즐기고 나누는 좋은 만화를 보면서 기쁨과 울림과 떨림과 반가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으면 더 좋겠고요. 부디 만화책 <꽃>이 500부 한정판을 넘어 2쇄도 찍을 수 있기를….

/최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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