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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12-28 18:05
민병두는 최초의 만화계 출신 국회의원 (민병두 블로그카페)
 글쓴이 : 김종범
조회 : 2,458  

< 만화 광장 창간호 표지>

1980년대 만화를 좋아하시던 분들은 “만화 광장”이라는 잡지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에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 구단’을 계기로 한국 만화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시대이다.

만화 광장은 1985년 12월에 창간된 최초의 대중 만화 잡지다. 상당한 판매 부수를 기록한다. 그 후 세월이 20여년 가까이 흘렀으니까 그 시절 청년 독자들도 벌써 30대 후반 40대 초반이겠다.
당시 만화 광장에는 당대 내 놓으라하는 만화작가들의 작품이 많이 실렸다. 허영만, 고우영, 강철수 박수동, 김삼 등의 작가들이 참여했고 나중에는 김혜린과 이현세, 오세영, 이희재 등이 들어 왔다.

이현세의 명작인 “머나먼 제국”도 만화광장을 통해 연재 되었다. 독재치하의 암흑기로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터라 시대에 대한 비판정신과 세세한 풍자, 그리고 성인 만화 다운 성적 묘사를 담고 있었던 만화광장은 창간 당시부터 꽤나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왜 뜬금없이 만화 잡지 이야기냐 하면 내가 바로 그 “만화 광장”이라는 잡지의 편집장으로 잠시 몸담았었기 때문이다. 지금 프레시안 편집국장으로 있는 친구 박태견이 학생 운동으로 인한 수배 생활로 도피중인 나에게 잠시라도 합법적인 신분을 취득하라며 만화 광장 편집장으로 추천해 주었다.

내 홈페이지 www.bdmin.net 에 자신의 베스트 셀러 “잘 찍은 사진 한장”을 게재료 없이 그냥(^^) 연재하게 허락해준 “사진작가 윤광준”씨도 이때 월간 마당 기자로서 인터뷰 기사 작성시 출장 촬영을 해주었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서로의 소식을 모르고 있다가 19년이 지난 올해 여름 윤작가와 절친한 내친형님의 소개로 만났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 했지만 서로 어디서 봤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윤선생을 언제 봤더라 하면서 한참 기억을 더듬다가 1989년 만화 광장에 내가 썼던 작가 이두호의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찾아보고서야 알았다. 15년의 세월은 기억을 흐릿하게 할 만큼 길었던 것인지, 우리가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겉모습이 변한것인지 모르겠다.

흐릿해진 기억처럼 15년전 그렇게 중흥기 였던 만화라는 장르도 이제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소년 중앙 ,보물섬, 르네 상스, 윙크,챔프, 점프, 주간만화, 만화광장 등 가판대마다 빼곡이 꽂혀져 있던 그 많던 만화 잡지들은 이제 그 자리에 없다.


어제, 11월 3일은 네번째 맞는 만화의 날이었다. 나는 문화 관광위 국회의원으로서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이현세, 이두호, 이희재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리던 만화작가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예전에 이분들과 함께 보신탕도 먹고 시바스 리갈도 마셨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원로 만화가들로부터 만화계 출신 최초의 국회의원이라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분들의 환영속에는 지난 만화 중흥기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만화의 새로운 부흥을 바라는 희망이 담겨져 있을 것이다. 영화, 게임, 인터넷, 스포츠 등 요즘은 만화 말고도 즐길것들이 너무 많아져서 만화가 그 전만큼 인기를 누릴 수 없는 것은 어쩔수 없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만화는 글과 그림이 함께 하는 표현의 묘미와 신 산업인 에니메이션으로 연결 될수 있는 가능성등 여전히 가치 있는 문화 장르이다.

사람들의 기억속에 만화라는 장르가 더 희미해 지기전에 만화가 뉴 미디어 시대의 새로운 토양에서 활짝 피어 날 수 있도록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노력과 시도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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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민병두 의원이 만화 광장 기자 시절 이두호 작가를 인터뷰한 기사입니다
원본은 국립 중앙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달에 만난 사람 : 만화 작가 이 두호 인터뷰 / 1989년 5월

글: 민병두 기자
사진: 윤광준


역사 의식을 가진 독보적 작가

언젠가는 도도하게 흐르는 장강처럼 모든 것을 품고 가는 역사를 붓으로 옮기고 싶습니다. 아차피 인간이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잖습니까, 집단을 이루어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그렇다면 역사도 결국 집단의 역사가 아닙니까, 물론 “독대” 도 그런 속에서 위치지워져야지요. 거기에 굳이 사상이나 이념을 담고 싶지는 않아요. 그것은 독자가 평가 할 테니…..

[장타령]의 작가 이 두호는 초여름 어슬녘 저녁에 술잔을 기울이면서 천천히 그러면서도 힘있게 말한다. 어떻게 보면 이 한마디가 만화가 이 두호의 현재의 위치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한국적 주인공과 주제를 갖고 있는 만화가는 그리 흔하지 않다. 여기에 향토성 짙은 내음을 가미시키고 시대의식을 만화에 반영하고 있는 작가를 찾을라치면 이 두호는 거의 유일하고 독보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그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항상 바라보게 되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그가 창조해 낸 인물 장 독대-우리들의 십몇 대 조상쯤 될 법한 그는 조선 시대를 무대로 백정, 소작인, 광대 등 항상 하층민 출신으로 등장하여 세상에 대해 아웃사이더로 빙빙 겉돈다. 못 먹은 듯 듬성듬성하면서도 거칠게 기른 머리 카락, 왕방울이면서도 툭 불거진 눈은 봉건 계급 사회에 대해 고집스런 거부와 한을 품고 있는 모습이다.

독대가 태어난 것은 6년전이죠. 주간 중앙에 연재한 [바람소리] 에서 처음 등장했습니다. 70년대를 통틀어 까목이와 얄숙이가 나의 주인공이었지만 아편처럼 못 잊어하던 캔버스에의 미련을 떨쳐 버리고 만화에 몰입하기로 작정, 뭔가 의미를 부여하면서 창조한 주인공입니다. 어떻게 보면 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고 저로서도 새로운 변신이었죠. 한자로 쓰면 獨臺입니다.

옛날 천민들이 모두 그랬듯이 그도 성없이 독대란 두 글자 이름 뿐이었다. 짓궂은 독자들이 변검사, 오판사 하듯 장씨 성을 붙여 장독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웬걸 실로 장씨 성을 갖자 그의 모습은 완전하게 창조된 인물로서 새로이 형상화 된다. 봉건시대의 단순한 불평 불만 분자가 아니라 향토적 정서가 물씬 배어 있고 속 깊으면서도 친근감가는 우리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울분을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 일으키게 하였다. 이제는 작가 이 두호 마저 그의 성씨를 장으로 즐겨 내세운다.

해골과 빈깡통만 그리던 대학시절

이 두호의 삶이 어떠했길래 자기 삶의 분신으로서 독대가 만들어 진 것일까? 63년도에 홍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우연히 6.3 사태 때 서울 문리대생들이 단식 투쟁하는 모습을 보았다.
“ 이해가 안갔습니다. 어떤 목적을 위해 굶는 사람, 단지 경험해 보기 위해 굶는자, 생활 자체가 굶주림의 연속인 자와의 차이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어릴때부터 겪은 고생은 몇마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얼마전 이사짐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몇편 안 남은 대학 시절 습작품을 찾아내었는데 온통 해골과 빈깡통 뿐이더군요. 그 시절, 나의 암울한 형편과 불만이 그런 식으로 표현된 것 같습니다.
이 두호가 1943년생이니 그 무렵 고생 안하고 자란 사람 있냐고 말할지 모른다.
졸업은 못했어도 미대 구경은 해보지 않았냐고, 그러나 이 두호의 고생과 의지는 남다르다.
대구에서 3남 1녀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국민학교를 입학할 시절까지는 비교적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측량, 목수 등 손재주로 벌어 먹으라면 못할게 없는 아버지가 그 손재주중의 하나인 도박으로 폐가 망신하면서부터 고생문이 열렸다.

오성중, 대구 영남고를 모두 야간부로 다니면서 혼자 힘으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학비는 미술대회 때마다 입상을 하니 장학금으로 충당되었지만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이 때 시작한 일이 출판사에 다니면서 삽화를 그리거나 채색하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호기심에 펴낸
만화가 [피리를 불어라] [ 등불] 등이었는데 이때가 중 2 시절이었다.
고교때에는 대구 문에 출판사에 취직하여 위인전의 삽화 일을 하며 학비며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러면서도 화가에의 꿈을 잊지 못해 미대를 지망하였다. 모아 놓은 돈으로 입학금은 낼 수 있었지만 그 다음 부터가 문제 였다.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했다. 서울역 주변에서 구두 닦기를 했고 명동 심지 다방 등지에서 밀감장사를 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없어 미아리 자취집까지 걸어 가기가 일쑤였다. 당시 고구마 4개가 10원이었는데 밥을 대신하여 하루 2개씩 먹고 버틴 적도 있다. 숙제를 할 때도 캔버스가 없어 군인들 가빠나 베니다판에서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아르바이트의 행렬은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국민학교 환경 미화를 도급 맡아서 생활비를 충당하곤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도저히 학비를 댈 수 없었다. 결국 65년말 군에 입대를 하였다. 우선 그 지긋지긋한 배고픔과 고통에서 벗어나야 했던 것이다. 아마 이 시절의 고생이 그의 작품에 짙게 배어나고 있다고 봐도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가난을 의식으로 승화

흔한 얘기일 수도 있지만 그에게는 지론이 하나 있다. “ 작품을 하는 사람은 조금은 배가 고파야 합니다. 물론 지나치게 배가 고파 작품을 상업화 시킬 정도라면 곤란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배고픔을 몰라서는 작품세계에 정신을 접합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배고픔에 대해서 지금은 이렇듯 간단하게 얘기하지만 당시의 그는 불마에 싸여 나쁜 길로 빠질 여지가 많은 사나이였다고 회고 한다. 그러한 그를 한 길로 계속해서 갈 수 있게끔 견인차 역할을 해 준 사람이 있다.

지금은 충청도 천원에서 목사로 있는 둘도 없는 친구 강 신호씨다. 가난을 함께 한 친구 , 그의 가난을 단순한 가난이 아닌 그의 의식과 삶으로 승화 시켜 준 친구이다.
이 두호는 인터뷰의 처음부터 끝까지 강목사 얘기를 하다 시피했다. 강목사는 중학교 시절 그 어려운 도스토예 프스키의 소설 등을 거침없이 읽었다 한다. 군대 가기전까지 동고 동락한 그가 준 영향이 오늘의 이 두호를 만들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밖에 그에게는 지금 자기를 있게 해준 잊지 못할 두 분이 있다. 한 분은 6.3 사태 당시 서울대 시위를 주도했던 사람중의 하나인 이 원제씨다. 경제학 박사인 그는 지금도 가끔 스토리에 대해 충고를 아끼지 않는다.
또 한사람은 국민학교 때 이 두호를 개인적으로 미술 지도 했던 남 무오 선생님이다. 5학년때 선생님이 전근을 가자 이 두호는 그 학교 앞까지 가서 기다리다 끝내 자신도 전학을 했다. 그 후 지금까지도 연락을 주고 받고 있는 이 분은 아버지에게서 물여 받은 손재주를 그림 그리는 일로 끌어 올려 준 분이다.

68년에 재대를 한 이 두호는 갈 곳이 없었다. 화가가 되기 위해 부업으로 만화를 그리기는 했지만 이제는 먹고 살기 위해 만화를 그려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아직 등단하지는 못했을지라도 화가가 생활고 문제로 천대 받는 만화가로 전업한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볼 때 커다란 아픔이란 것은 쉽게 짐작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이 두호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회화에 대한 미련 보다는 만화를 더 사랑한다. 만화에 대한 인식, 애정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자
“ 서구 화단에서는 어떻게 보면 피카소의 선을 위주로 한 화법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이미 만화적 영역과 회화적 영역의 구별이 없어졌습니다. (만화광장 6월호에 실린 로제 브라숑의 그림을 손으로 가르키며) 물론 만화가 예술로서 승화 , 발전된 탓이겠지만 만화에 대한 차별적 인식이 그만큼 없어진 것이죠. 만화가의 책임이 먼저 입니다만 만화를 차별시하고 백안시하는 풍토가 못내 아쉽습니다”

잠깐 얘기가 샜지만 제대 후의 이 두호는 박 기정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를 본격적인 만화가로서 등단시켜 준 것은 1969년 3월에 창간된 [소년 중앙]이었다, 까목이와 얄숙이가 남, 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두호의 만화는 70년대 중반 [비둘기 합창]으로 아동 만화 로선 인기의 절정을 이룬다. 70년대 초 만화 잡지사 기자 월급이 24000원이었을때 부록 한권 그려내면 38400원을 받았다고 하니 이때부터 처음 생활이 펴진 것이라 하겠다.


만화가의 정신에 눈 떠

어쨌든 까목이와 얄숙이의 인기로 생활안정을 취한 그는 그러면서도 캔버스에의 미련을 잊지 못한다. 그러다가 약 6년전부터 만화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목적의식도 있고 재미도 추구하는 만화를 그려려는 만화가의 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만화가의 정신이라는 말이 다소 생경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만화를 보는 인식이 새로와진다면[장인 정신]이 없는 만화가는 독자로부터 인정받지 못할 지 모른다.
특별한 계기가 있어 변신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만화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자연 그의 삶과 의식을 불어 넣은 것이다. 그가 살아왔던 삶속에서 얻고 느낀 것을 시간과 공간을 달리 하지만 봉건 시대를 빌어서 민중의 하나인 독대를 통해 표현하고 싶은 강렬한 욕구를 그대로 붓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이 두호 그는 만화를 제대로 그리기 위해 책도 부단히 읽는다. 이 규태의[개화백경] 등 숱한 고전, 야담, 사서를 수시로 읽으면서 스토리를 구상한다. 된장 냄새 물씬 풍기는 토속어의 대사는 이런 노력의 결과 일 것이다. 또한 초가집 하나도 엉성하게 그려내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고증을 한다. 광대의 몸짓 하나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마지막으로 이 두호의 과제는 무엇인가?

독자들이 흔히 이 두호에 대해 의아해 하는 것이 있다. ‘그의 작품에는 집단성이 없는 것 같다. 독대라는 개인을 돌출시켜 개인적 한과 불만을 표출하는 데 그치고 있을 뿐 아니다’
‘승려나 무사를 묘사할 때 선이 날카로운 것이 왜풍 냄새가 난다’ 는 독자들의 평에 대해서 이 두호는 의외로 담담하게 받는다. “ 사실 정확하게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스스로 극복해야 할 일이죠. 가령[장길산]같은 대작을 만화로 그려보고 싶습니다.[바람소리][내이름은 장바우] 등에서 몇번 시도해 보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더군요.

그만큼 제 작품을 관심있게 보아 주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이겠지요”

특별하게 센세이션을 일으키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항상 문제 의식과 작가 정신을 추구하는 작가. 그가 말하듯 아직은 두렵지만 일제하나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본격 시대극화에의 도전, 한국적 선의 끊임없는 추구에 우리 모두 끊임없는 격려와 기대를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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