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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04-10-26 23:12
"만화도 문화의 한 장르입니다" [인터뷰]영원한 교사 박재동 화백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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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종범
조회 : 2,405  
"박재동 선생님, 병미 아세요? 중경고등학교에서 선생님께 미술을 배웠고, 미술반도 했는데…."

이번 인터뷰에 동행한 한병선 간사가 동생 이야기를 꺼냈다.

"아! 병미! 알죠? 그래 병미는 요즘 어떻게 지내요?"

몸이 불편해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20년 전 제자 이야기에 희색을 띠며 반응하는 박재동 선생의 모습을 보면서 '천성적인 교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한 시간 예상했던 인터뷰는 2시간을 넘겼고, 선생님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셨다.

- 선생님의 요즘 근황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한겨레 그림판을 그만두실 때만 해도 애니메이션을 제작한다고 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 일은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는지요?
▲ 2004년 박재동 화백과의 인터뷰
ⓒ2004 정병오
"애니메이션 제작은 지금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4·3항쟁의 비극을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군요. 우선 제가 이런 일에 경험이 없었고, 시나리오나 자본 마련도 쉽지 않았습니다.

우선 사무실을 내고 사람을 모아 '오돌또기'라는 제작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만 살아가는 일이 급하다 보니 다른 일들과 병행하고 있습니다. 하면서 많이 배우고는 있는데, 어쨌든 계속 진행 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선생님이 쓰신 책들을 보면 어렸을 때 가정 형편이 많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소질과 꿈을 키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지금 학교에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아이들이 많거든요. 선생님 경험에 비추어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지요.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이 만화 가게를 했습니다. 여기서 떡볶이나 팥빙수 등도 팔았죠. 그런데 당시 만화는 아이들이 봐서는 안 되는 나쁜 문화였고, 떡볶이나 팥빙수는 불량식품의 상징이었죠.

학교 종례 시간에 선생님이 '만화방에 가지 마라, 떡볶이나 오뎅 사먹지 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게 바로 우리 집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린 마음에 얼마나 불편했겠어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계시면서 가게 일을 약간씩 도우셨는데, '왜 우리 아버지는 회사원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학교에서 가정방문을 온다고 하면 지진이라도 나서 선생님이 안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어머니가 늘 밝은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일 겁니다. 어머니는 가게 일과 아버지 병수발을 도맡아 하면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는 일(만화 가게)을 하고 있어, 그로 인해 아이들이 기죽지 않게 하기 위해 더 노력을 하셨죠.

어렵지만 웃음을 잃지 않고 사는 삶 자체가 다른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것 같아요. 제 어머니의 삶을 닮은 책(천리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을 보고 한 소녀 가장이 큰 위로를 받았다고 연락을 해 온 적도 있습니다.

또 한 가지 경험은 중학교 때 한 친구 덕분이었어요. 당시 학교에 제출하는 '가정환경 조사서'에 냉장고, 전화기, TV 등의 소유 여부를 묻는 질문이 있었는데, 저희 집에는 물론 아무 것도 없었죠. 그리고 아버지 직업란에도 '상업'이라고 적었지만, 내적 열등감이 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친구가 자기 집에 초대를 했는데, 그 친구의 집에 가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정말 집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3평 정도의 판잣집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게 밥까지 챙겨주면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 친구를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더군요. 이후 저는 가난에 대한 열등감을 벗어버렸습니다.

이러한 가난했던 저의 집안 형편은 이후 시사만화가로서의 삶에 큰 밑천이 되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만화 가게를 하면서 가난한 기층 민중의 삶을 살았으니 어떤 종류의 비리와도 관련될 것이 없었고, 친척들도 농민, 도시 서민 등 권력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시사만화가로서 아무런 걸림없이 성역없는 비판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대학 졸업 후 교사의 길을 선택하셨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습니까?
"원래 교직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예술가로 살아가려면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치열한 상황으로 자기를 몰아넣고 벼랑 끝에 늘 서 있어야 하는데, 교직은 안정적이잖아요. 그래서 대학 시절 교직 과목도 이수 안 하려고 했죠. 그런데 친구가 '세상 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고,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며 나의 순진한 생각을 나무라더군요. 그러면서 나중에 교사를 안 하더라도 일단 자격증은 따 놓으라고 해서 교직을 이수했어요. 결과적으로 그 친구 말대로 된 셈이죠.

대학 졸업하고 나니 특별히 할 게 없더군요. 미술학원 강사도 해 보았지만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고, 그것도 힘들더군요. 교사를 안 하려고 했지만, 교사를 안 하면 결국 다른 일을 해야 했기에, 차라리 교사를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 선배 후임으로 휘문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들어갔죠."

- 당시 선생님께 배웠던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기존 학교의 상식을 뒤집는 파격적인 일들이 많았다고 하더군요. 당시 교직 생활을 회상해 주시죠.
"휘문고등학교에는 참 희한한 선생이었죠. 처음에 학생들과 똑같이 머리를 빡빡 깎고 교복을 입으려고 했어요. 교사가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면 아이들과 같아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어요. 그런데 목 부분의 호크를 둥글게 고쳐서 입으려고 했는데, 교복집에서 안 된다고 하는 바람에 교복 입는 것은 포기했죠. 이렇게 하다 보니 휘문고에서는 1년만에 쫒겨났어요.

이유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과 비슷했죠. 물론 키팅 선생님과 같은 정도의 교육철학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요. 이후 중경고등학교에서도 이상한 선생이긴 했지만, 학생들이나 학교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교사를 하다 보니 교직이 너무 소중하게 느껴졌습니다.

특별히 좋은 수업을 하고 난 후 밀려오는 행복감은 대단했어요. 오후 수업을 마친 후 교무실에 비치는 노을빛을 보면서,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고 생각하곤 했어요."

- 교사 생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미술 시간에 공동 작품을 많이 시도했는데, 한 번은 '학급 단위로 무엇이든지 만들고, 어디든지 설치해도 좋다'라고 했더니, 아이들이 작품을 기획하고, 비용을 모으면서 만들고 설치하는데 얼마나 신나하는지, 그리고 아이디어가 얼마나 기발한지 몰라요. 로봇, 첨성대, 용, 배, 허수아비, UFO, 거북선 등. 이것들을 축제 때 전시했는데, 아이들이나 저나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기억해요.

저는 우리 교육이 개인적인 성취만 요구하고 더불어 같이 성취하는 경험을 너무 시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은 남보다 뛰어날 때 성취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여러 명이 협력하고 배려해서 무언가를 해낼 때나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 기여할 때 행복감을 느끼거든요. 그리고 이런 것이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요. 그런데 우리 교육에는 이런 기회가 너무 없어요."

- 교사로서 참 행복을 느끼며 생활했다면 교사를 그만두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아이들을 가르치는 가운데서 오는 행복에 빠지다 보니, 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고 싶은 생각이 사라지더군요. 화가가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불안하고 쫓겨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고 행복하니, 이러다가 화가로서는 무력해지고 죽겠다는 두려움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벼랑으로 나를 다시 몰아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교사를 그만두었습니다."

- 왜 그렇게 교직 생활이 행복했다고 생각하세요?
"세상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인 것 같아요. 그림도 왜 그리냐고 하면 예술혼, 명예 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결국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리는 것이거든요. 그런데 교사는 아이들을 사랑함으로 이 궁극적 목적인 '사랑'이 이루어지잖아요. 이것은 명예가 주는 행복하고는 질적으로 다른, 굉장히 직접적이고 질 높은 행복인 것 같아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 행복이 너무 크고 완벽하다 보니 다른 기쁨을 추구할 의욕을 잃어버리는 것 같았어요."

-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참 부끄럽습니다. 결국 오늘날 우리 교단의 위기는 결국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린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교직 사회를 보면 많은 교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잃어버리고 아이들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고 적당히 타협하며, 교육 외적인 일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제가 학교에 있을 때, 수업 시작 종이 울리면 가장 천천히 시간을 끌면서 분필과 출석부 챙기고, 마지 못해 교실로 올라가는 선배 교사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도 많이 있었어요. 그때는 젊었으니까 가급적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몸을 사리지 않으며 아이들과 함께 하려고 했지만, 이 생활이 반복되다 보면 열정은 식고 일상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은 있었습니다.

모르죠. 제가 6년 정도 한참 열정으로 가르치다가 그만두었으니까 교사의 행복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고, 계속 했다면 어떠했을지 자신할 수는 없죠. 다만 그때도 동료 교사들 가운데는 교사 모임 등을 통해 끊임없이 공부하고 격려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들은 지금 더 노련한 모습으로 아이들 속에서 행복을 찾고 있겠죠."

- 교사를 하면서 아이들 속에 묻혀 지내다 보면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이 길러지기가 쉽지 않을 텐데, 교직 생활 이후 시사만화가로서의 사회의식은 어떻게 길러졌나요?
"제가 어렸을 때 그린 만화를 보면 그때도 종교의 위선이나 사회적 모순을 풍자하는 그림이 제법 있어요. 그러니까 제 속에 무언가 사회의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고 부정하려는 기질이 강했었나 봐요. 교사 시절에도 교과서는 완전히 무시하고 내가 생각하는 수업을 했거든요. 눈 오는 날에는 눈사람도 만들고, 운동장에 물을 뿌려 그림을 그린다든가.

하지만 실제로 사회의식은 그리 깊지 못했어요. 그냥 예술 지상주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친구들의 영향으로 광주민주화 운동을 알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예술만이 아니라 사회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게 된 것이죠.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나라 최초의 현실참여적인 미술운동인 '현실과 발언'에 동인으로 참여를 했죠.

한겨레신문에서 시사만화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것이야말로 '현실과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어 활동하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저 나름대로는 '민주화운동'에 만화를 통해 활동한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다른 사람들은 민주화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는데, 나 혼자 풍경화를 그린다는 것이 왠지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였어요. 그러니까 풍자 만화를 그리는 것이 그 당시로서는 가장 맞는 일이었어요."

- 선생님의 한겨레 그림판은 시사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시사만화가로서 전성기를 구가할 때 그 일을 그만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시사 만화를 시작한 것은 만화를 사용해 민주화에 기여하자는 동기에서였습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물론 민주화가 완전히 이룩된 것은 아니었지만 큰 방향에 있어서는 민주화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내가 할 일은 다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문화적 '창조' 작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또 한 가지는 시사만화를 그리면서 어느 정도 실력이 느는 면도 있었지만 아이디어나 발상에 있어서 스스로의 바닥이 보이더군요. 그게 그것인 뻔한 그림을 그리고 싶진 않았거든요.

하지만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꿈이 없었다면 부족한 부분은 공부로 채우면서 계속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애니메이션이 너무 하고 싶었기 때문에 회사에 3년째 강청하여 그만두었죠. 그 때 그만두었기 때문에 사람들 머리 속에는 계속 잘 할 것 같다는 인상을 남긴 모양입니다."

- 애니메이션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요?
"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이웃집 토토로> <바람의 계곡 나우시카> 등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전까지 미국의 디즈니 만화에서는 전혀 감흥을 받지 못했는데, 일본의 미야자키 감독의 작품을 접하면서 애니메이션이 예술의 한 장르가 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작품 세계를 구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때 교사를 그만두고 고향 제주에 내려가, 제주의 역사와 인간을 그려 온 강요백 화백이 그린 제주 4·3 항쟁과 관련한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고자 마음먹었죠. 그런데 처음부터 너무 큰 기획을 하다 보니 그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단편은 몇 편 제작했어요."

- 사실 아이들은 만화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교사 입장에서는 이게 그렇게 달갑게 보이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만화 가운데는 좋지 않은 가치관을 담고 있는 것도 많아 이에 대한 지도도 쉽지 않고요.
"우선 만화가 독서냐, 독서의 적이냐 하는 문제를 생각할 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만화는 독서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는 책은 무겁고 어려워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념에서 비롯한 것 같아요. 그림을 천시하는 풍조 때문에 책이 쉽거나 그림이 많으면 유치하다고 여기는 거죠.

그리고 전통적으로 책은 출세의 수단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출세나 입시에 도움이 되는 것만 중시하고 나머지는 무시했어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소설이나 영화도 오랫동안 불량스럽게 취급받고 학생들에게 금기시 되어 왔어요.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수학능력시험이나 논술이 실시되면서 소설이나 신문 같은 것은 장려를 하고 있죠.

만화는 소설이나 영화와 똑같은 문화의 한 장르라고 보면 제일 정확합니다. 여기에는 정보도 있고, 감동도 있고, 웃음과 오락, 가치관, 삶, 인간적 고민 등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실 만화를 배척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화를 안 보는 사람들입니다. 만화에 대해 잘 모르면서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죠.

사실 일반 책도 안 보고 만화도 안 보는 아이들이 더 문제지, 만화를 보는 아이들이 문제는 아닙니다. 아이들은 만화 속에서 스트레스도 풀고 즐거움도 찾거든요. 이런 것이 삶에 대한 의욕과 힘을 주거든요.

우리는 아이들에게 '학생의 본분은 공부다'라면서 억누르기 쉽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학생이기 이전에 청소년이라는 한 인격이죠. 공부도 본분 중의 하나지만 삶 속에서 재미와 기쁨을 찾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행복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중요한 본분이죠. 만화를 보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고 여길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소설이나 영화와 마찬가지로 만화도 그 내용 면에서 수준 높은 것과 쓰레기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해로운 것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교사나 부모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과 사회가 다양한 현실을 품고 있고 결국 부정적인 것도 소화하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다양한 작품을 접하면서 선택하는 능력을 길러가야 합니다. 결국 많이 읽는 사람이 고를 줄 아는 능력도 생깁니다.

사실 <죄와 벌>의 경우 도끼로 사람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경우 유부녀를 좋아해 자살하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이를 따라서 죽은 사람도 있고요. 하지만 우리는 이를 명작이라 하거든요. 그런데 만화가 그런 장면을 담거나, 모방이 생기면 엄청난 비난을 해요. 만화를 소설이나 영화와 같이 취급해야 한다고 봅니다."

인터뷰를 마칠 즈음 박재동 선생님은 다시 교사를 하게 된다면 '발표회' 중심의 교육을 하고 싶다고 했다. 즉 아이들에게 프로젝트를 주고 그것을 연말에 발표하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그동안 배웠던 모든 지식과 에너지를 쏟아 무언가를 만들어내게 하겠다는 것. 그것이 너무나 소중한 교육임을 강조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학교의 화장실이나 매점은 아이들이 직접 지어보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허락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표출하는 그에게서 아직도 뜨거운 교사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박재동 화백은 누구?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79년부터 휘문고등학교에 1년, 중경고등학교에 5년간 근무했다. 1987년 한겨레신문 창간 시사 만화작가 공모에 응모, 당선되면서 '한겨레만평'을 8년간 담당하면서 시사 만화가로서 신문 시사만평의 새 지평을 열었다.

제주도 4· 3항쟁을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 위해 한겨레 신문을 그만 둔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주)오돌또기 감독으로 있으면서 (사)우리만화연대 이사,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운영위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환상의 콤비> <목긴사나이> <만화내사랑> <천리도망은 해도 팔자 도망은 못한다더니> <실크로드 스케치여행> <한국만화의 선구자들(공저)> <십시일反(공저)> 등이 있고, MBC 뉴스데스크 <박재동의 TV만평>과 <자갈치의 아침(부산 민주공원 건립기념 상영작)>을 제작, 감독한 바 있다.

www.odolttogi.co.kr, tangripark@hanmail.net
이 기사는 월간"좋은교사"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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